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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RDer

열심중독자의 고백

1.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어떤 일이든 열심히 하는 편이신가요?
2. 당신은 좋아하는 일, 하고 싶지 않은 일, 싫어하는 일 등을 모두 열심히 하나요? 
3. 당신은 스스로를 성실하다고 생각하나요?

위의 3가지 질문에 모두 "Yes" 라고 응답한 당신,
혹시 '성실함'으로 무장한 '열심중독자'는 아니신가요?


 

열심중독자란?

열심중독은 열심히 하는 행위 자체에 중독되는 것으로, 열심중독자는 열심히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중독된 사람을 의미해요. 열심중독의 자매품으로 일하는 행위에 중독되는 워크홀릭도 있어요.

중독(holic, 中毒) 

1. 생체가 음식물이나 약물의 독성에 의하여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일
2. 술이나 마약 따위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병적 상태
3.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 버려 정상적으로 사물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

※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Unsplash

 

저는 열심중독자인 자격증 컬렉터입니다.

저는 열심중독자에요.

10년 넘게 주 단위 마감에 시달리고 야근을 일상으로 하면서 마감증후군에 시달렸어요. 늘상 마감에 치이며 여유없이 달리는 일상을 보냈지요. 그렇게 10년을 달리고 나니 짬바(라 부르고 제안서 작성스킬이라 쓰는 능력치)가 올라갔는지 마감을 위해 투자해야 할 상대적인 작성시간이 줄어들었고,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하루종일 끙끙대야 할 장표구성도 이제는 각종 단축키와 몇가지 자료로 쓱쓱 그리고 쓰다보면 얼추 장표가 완성되는 수준에 이르렀어요. 어떤 종류의 자료든 어느 정도 퀄리티를 갖춘 기획서로 시각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구요. 기술자가 되었고, 업무에 투자해야 하는 절대적인 시간이 엄청나게 줄어든 거죠.

그러자 새로운 고민이 생기더라구요.

"뭘 해야 하지?"

입사 후 12년동안 나만의 시간을 온전히 가지지 못하고 워라밸이 없는 삶을 살아왔는데, 갑자기 주어진 여유시간을 어떻게 보내야할지 막막해졌어요. 최근 자료를 조사하고, 연구를 수집하고, 급하게 어느 폴더에든 넣어놓았던 기존 자료들을 정리하며 보내는 시간도 잠시, 그렇게 시간이 계속해서 흐르면서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어요.

뭐라도 해야 해, 뭐든 할 것을 만들어서라도 해야 해.

그런 압박감이 저를 짖눌렀어요. 뭐든 배우거나 만들거나 새로 시작하지 않으면 무가치하고 무력한 삶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지요. 단순히 최신 자료를 찾더라도 하루에 어느 정도 양을 채우지 못하고 정리해두지 못하면 마음이 불안해졌어요.

일 잘하는 나, 일을 열심히 하는 나의 가치감이 훼손될 것 같은 불안감이 느껴졌어요.

...사실 저는 자격증 컬렉터입니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평일 저녁과 주말을 투자해서 자격증을 하나씩 수집하기 시작했어요. 그 노력의 결과, 어느 정도의 공신력을 갖춘 큐넷(한국산업인력공단) 자격증과 교육 관련 자격증이 하나둘씩 늘어났어요. 그렇게 제 취미는 자격증 수집이 되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나는 계속해서 열심히 살았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열심중독의 또다른 발현 행동이죠.
(취득 자격증에 대해서는 다른 이야기로 정리해볼게요.)

(c) Pixabay

 

우리는 왜 열심중독자가 되었을까요?

우리는 왜, 언제부터 열심중독자가 되었을까요? 난자와 정자라 이름붙은 세포시절일 때부터 경쟁을 통한 생존 서바이벌이 시작돼요. 부모님으로부터 무한애정을 받을 수 있는 유아시기를 지나 학교에 입학하게 되면 경쟁이 더 심해지죠. 수능을 준비하는 시기가 되면, 전국단위 모의고사 등수로 랭킹이 매겨지며 경쟁의 구도가 수치화돼요. 모든 성취는 경쟁의 저울 위에 놓이고 열심히 하지 않으면 내 옆자리의 친구보다 뒤쳐질 것 같다는 생각으로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기기 위한 압박에 시달리게 됩니다.

대학에 가면 장학금 또는 취업준비를 위한 학점관리 등으로 학우들과 경쟁하고 소위 좋은 기업이라 불리는 곳에 취업하기 위해 서류, 인적성검사, 면접을 지나 치열한 경쟁을 뚫고 회사에 입사하고요, 그리고 회사에 입사하게 되면 남보다 더 빨리 승진하기 위해, 혹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 경쟁을 이어나갑니다.

결혼, 승진, 육아, 집 장만, 주식 등 우리가 해내야 할 것들의 생애과업 리스트는 줄지 않고 계속 늘어나요. 해야 할 일들의 리스트를 하나하나를 완수하다보면 어느 새 죽음을 앞에 두겠죠. 빈부, 성별, 국적 등 어느 것과도 상관없이 다가올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 우리는 끊임없는 경쟁과 비교 속에서 살아왔고 또 살아갑니다.

경쟁은 당연하고 그 경쟁에서 남보다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은, 여유를 즐기고 있는 다른 친구들을 향한 질투심과 시기심으로 다가오기도 했어요. 왜 나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저 사람은 그렇지 않지? 왜 나만 이렇게 조바심을 느끼고 있지? 불안하고 조급한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의 여유로움의 원인을 능력이 부족해서 라고 (마음 속으로) 폄훼하기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열심중독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그리고 저는 스스로 열심중독이라고 진단을 내렸고, 인정하기로 했습니다. 그저 열심히 하는 행위 자체에 중독이 되었다고요.
그리고 열심중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중이에요. 그냥 뭔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압박감을 내려놓고, 덜 열심히 해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는 중이에요.

열심중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 현재 한달여 남겨놓은 자격증 시험이 저를 기다리고 있어요. 해야 할 일을 만드는 저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어요. 다만, 조금 더 여유롭게 준비하려고 노력중입니다.

자격증 없어도 돼. 지식욕구를 채우기 위한 자격증이지, 그게 나를 증명하는 수단은 아니야.

저 위의 말은 단순히 자기위로가 아닌, 사실이기도 해요.

저는 '일'이 내 삶에 주는 영향력을 조금 내려놓고, 아주 조금 덜 열심히 일 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일과 나를 동일시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일의 성과가 나를 평가하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일하지 않는 시간의 내 삶을 가꾸기 위한 시간을 만들고 있어요.

 

'열심히 하는 행동 그 자체에 몰입하고 있던 나'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열심히' 하는 내 모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그러시길 바랍니다.

(c) Pixabay